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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길모어 걸스] - 궁전 밖에 사는 공주님들의 이야기

by 북카루 2024. 5. 23.

※ 이 글에는 [길모어 걸스]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길모어 걸스 Gilmore girls] 는 2000년에 첫 시즌이 제작되어 2007년에 7시즌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2006년 즈음부터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해서 전 시즌을 다 보았다. 2016년에 넷플릭스에 가입하면서 1시즌부터 쭉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다시 찾아 보기도 했는데 리부트 소식이 들려서 어찌나 반가웠던지. 2016년 리부트판인 [길모어 걸스 : 한 해의 스케치] 도 보았다. 아쉬움이 없진 않았지만 다시 볼 수 있는 게 어디냐 하면서.

 

10년만에 [길모어 걸스]를 보니 느낌이 참 달랐다. 2006년에 보기 시작했을 때의 느낌은 따뜻한 드라마와 생활 시트콤이 합쳐진 롬콤(로맨틱 코미디)였다. 뜨겁고 진한 커피를 큰 머그잔 가득 담고 설탕 바른 도넛을 곁들인 느낌. 2016년에 다시 보기 시작했을 때는 따뜻한 달콤함만 즐기기에는 자꾸 불편한 쓴맛과 텁텁함이 남았다.

 

지금 나에게 이 드라마의 장르를 물어 본다면 나는 '판타지' 라고 답할 것 같다.  [길모어 걸스] 는 조금만 뜯어 보면 정말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로렐라이 길모어는 아침부터 미국식 정크푸드와 진한 커피를 마구 먹고 패션 잡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미국 북동부 코네티컷의 유서 깊은 와스프(WASP) 가문 부잣집 외동딸이기도 하다. 16살에 집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사립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아이비리그에 진학했을 것이다. 로렐라이는 상류층 공주님의 삶에는 미련이 없고 서민 생활을 매우 만족해 한다. 하지만 로렐라이가 부모님이 사는 저택을 찾아가 문을 두드려야 하는 사건이 1시즌 1화에 생긴다. 로렐라이의 딸 로리가 사립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사립학교 학비를 감당할 수 없는 로렐라이는 부모님께 도움을 청하고 이후 7시즌 동안 상류층 동네와 서민 동네를 왔다갔다 하게 된다.

 

로렐라이는 부모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솔직히 별로 불쌍하진 않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운이라고 '금수저' 네포 베이비' 같은 말이 유행하는 세상에 상류층 부자 부모님 슬하에 태어난 건 솔직히 행운 아닌가? 정말로 그쪽 세계와 연을 끊고 싶었다면 딸 로리를 사립학교에 보낼 욕심을 접었어야 한다. 그러면 이 드라마는 1시즌 1화에서 끝나 버리겠지만.

 

1시즌 1화 첫 장면에서 로렐라이는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라는 소설 제목을 인용하며 유식한 티를 내기도 한다. 서민 동네의 다이너 식당에서 마주친 남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로렐라이가 겉모습은 그저 젊고 예쁜 아가씨 같지만 실은 사립학교 우등생 출신, 공주님 혈통임을 은근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좀 오글거린다.

 

아직 로리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로렐라이가 예쁘지만 그래도 성격이 좀 별나고 독립심이 쓸데없이 강한 공주님으로 묘사된다면, 로리는 그냥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내지는 요정이다. 예쁘고 똑똑하고 성실하고 착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로리를 예뻐한다. 성적까지 우수해서 사립학교 전입 허가도 받는다. 그 사립학교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아이비리그 대학교에 진학한다. 공부만 잘 하는 우등생이 아니라 엄마 로렐라이의 영향으로 음악, 영화 등 대중문화 레퍼런스에도 빠삭하다. 당연히 남자들에게도 끊임없이 인기가 많다.

 

로리는 엄마와 달리 상류층 부자인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사이가 좋다. 로리는 주 생활 근거지가 스타스 할로우라는 서민 동네일 뿐 삶의 영역은 사립학교, 할머니 할아버지의 저택, 아이비리그 대학교에 나누어 걸쳐져 있다. TV를 보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평생 경험하지 못할 특혜를 누리는 삶이다. 로리가 고졸 서민 남자친구와 만나는 게 못마땅한 할머니가 또래 명문가 남자애들만 모아 새 남친 찾기 파티를 열어 주고, 파티 의상으로 티아라를 씌워 주는 장면까지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결국 할머니의 계획은 성공해서 로리와 서민 남친은 헤어진다. 한 시즌 정도를 조부모의 저택에서 아예 거주하기도 한다. 로리도 결국은 '길모어' 라는 성이 붙는 상류층의 공주님이다.

 

[길모어 걸스] 7시즌 전체를 '상류층 공주님들의 서민 체험' 으로 요약하려는 건 아니다. 철 없을 땐 재밌게 봤지만, 철 들고 보니 예쁜 공주 판타지로 보일 뿐. 로렐라이와 로리에게는 좀 지나친 판타지 요소들이 있다. 우선 아무리 먹어도 살찌지 않는다는 것! 정크푸드와 설탕 가득한 음식을 그렇게 즐겨 먹는데도 말이다. 피부도 늘 깨끗하다. 둘 다 어딜 가나 인정받는 미인으로 묘사된다.